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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호텔 주방장들 목장·장터에 간 까닭은 …
2014.10.21 05:53 2768

호텔 주방장들 목장·장터에 간 까닭은 …

[중앙일보] 입력 2012.08.17 04:04 / 수정 2012.08.17 10:29

요리 솜씨보다 식재료 품질 경쟁 시대

서울 청담동 SSG 푸드마켓 안에 있는 음식점 ‘그래머시 홀’은 인테리어가 독특하다. 지난달 문을 연 이곳에선 쇼윈도에 판매할 음식이나 음료를 진열하는 대신 파·마늘·버섯·피망 등 음식 재료를 넣어둔다. 이는 단순한 진열품이 아니다. 실제로 그 재료를 주방의 요리사들이 계속 갖다 쓰며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고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재료가 얼마나 신선한지 고객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장치”라고 서동찬 매니저는 설명했다. 파는 건 음식이지만 고객을 끄는 건 식재료인 셈이다. 이렇게 요리에서 식재료에 힘을 주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특급호텔 주방장들이 좋은 식재료를 찾기 위해 전국 산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서울 청담동 음식점 ‘그래머시 홀’. 쇼윈도에 식재료를 쌓아두고, 그 재료로 요리하는 모습을 고객들에게 보여주면서 음식을 판다. 이 음식점의 마케팅 전략 포인트는 ‘식재료에 대한 자신감’이다.

“고객 감동, 식재료 수준에 달렸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와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두 호텔의 음식을 책임지고 있는 배한철 총주방장은 최근 강원도 평창의 도원농원에 다녀왔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사용할 한우의 사육 환경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축사에 들러 위생 상태를 점검하고, 초음파 기기를 이용해 소의 육질을 확인했다. 임신한 소를 방목해 키우는 현장도 둘러봤다. 배 총주방장은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기 위해 직접 청정지역을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식재료로 쓸 소를 직접 보고 구입하는 것은 요리하는 입장에선 번거로운 일이다. 안심·등심 등 요리에 주로 사용하는 부위를 따로 주문해 받아 쓰는 것이 아니라 소를 마리째 사와야 하기 때문이다. 소의 각 부위가 골고루 활용될 수 있도록 메뉴와 요리법을 개발해야 하는 일이 주방의 숙제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를 가욋일로 볼 수만은 없다. 배 총주방장은 “식재료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어 레스토랑마다 우수한 먹거리를 발굴해 골라 쓰는 일이 중요한 업무가 됐다”고 말했다.

남다른 식재료를 찾기 위한 노력은 다른 호텔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부터 ‘명품 식재료 TF’를 가동하고 있는 서울신라호텔 서상호 총주방장은 “이제 셰프의 기술이 레스토랑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는 아니다”라고 짚었다. “고급 미식 고객들은 대부분의 조리법을 다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제 재료 자체의 등급이 다를 때 더 감동한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서울신라호텔 뷔페 레스토랑 ‘더 파크뷰’의 과일 코너에 등장했던 밭딸기도 ‘명품 식재료 TF’의 성과 중 하나다. 구매 담당자가 강화도 산지를 방문해 작황 상태를 확인하고 가져온 밭딸기를 총주방장을 비롯한 셰프들이 시식한 뒤 뷔페 식당에 내놓기로 결정했다. 호텔 납품 기준보다 당도가 떨어지고 모양은 못생겼지만 노지에서 키운 국산 제철 식재료란 점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밭딸기는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딸기보다 보존성이 낮아 매일 아침 그날 쓸 딸기를 수확해 가져와야 했다. 호텔 측은 매일 아침 강화도 농가 10곳에서 수확한 딸기 20㎏을 택시로 배달받았다. 택시비만 매일 5만원씩 들었다.

택시 타고 온 딸기는 고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강화도에서 오늘 아침 따온 밭딸기’라며 ‘1년 사계절 동안 노지에서 자연의 흐름대로 자라 자연의 기운이 담뿍 담겼다’는 안내문구가 고객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올 5월부터 서울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에서 사용 중인 가거도산 건해삼도 ‘명품 식재료 TF’에서 발굴한 식재료다. 기존에 썼던 중국산 건해삼보다 안전하고 신선한 국산을 찾기 위해 전국의 해삼 산지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전남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4시간30분을 가야 도착하는 가거도에서 원하는 수준의 해삼을 찾았고, 전량 신라호텔에서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1 청담동 SSG푸드마켓의 방사유정란 판매대는 매일 오후만 되면 텅 빈다. 당일 아침 낳은 계란 소량만 판매하기 때문이다. 산란량이 떨어지는 한여름엔 전날 낳은 계란을 판매하고 있다. 2 그랜드·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 배한철 총주방장이 강원도 평창의 목장을 찾아 호텔에서 사용할 한우의 사육 환경을 점검하고 있다.
“음식축제·재래시장을 돌아라”

서울 세종호텔 뷔페 레스토랑 ‘엘리제’의 박초로 주방장은 지난달 충남 태안 연꽃축제에 다녀왔다. 8월부터 선보이는 사찰음식 중 연꽃을 활용한 메뉴를 집어넣기 위해서였다. 박 주방장은 “매월 지방 음식축제에 참가해 현지의 특수작물을 구해 메뉴를 개발한다”고 말했다. 연꽃축제에 다녀온 뒤엔 연잎밥·연잎차와 연꽃의 씨앗인 연자로 만든 연자죽을 개발해 뷔페 메뉴로 내놨다.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의 수펙스 김치연구소도 양질의 식재료를 찾아 전국의 산지를 뒤진다. 연구소 이선희 과장은 “좋은 소금과 고추를 구하는 게 김치 맛의 관건”이라면서 “원래 전남 신안군 소금을 사용했지만 지난해 일본 원전사고 이후 신안군에 3년 이상 간수를 뺀 소금이 동나 이젠 영광군 소금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양한 지역, 다양한 먹거리를 직접 확인하고 골라오기 위해서는 직접 현장에 갈 수밖에 없다. 지역의 장터와 재래시장이 요긴하게 이용된다.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R&D센터 백석남 팀장은 경남 통영의 중앙시장과 서호시장, 제주도 동문시장 등을 자주 들른다.

요리사가 직접 장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구매팀을 통해 받은 식재료로 요리하던 시대는 지난 셈이다. JW 메리어트 호텔 서울의 뷔페 레스토랑 ‘더 카페’의 전근식 수석조리장은 매주 목요일 새벽 노량진 수산시장에 간다. 목요일 저녁마다 진행되는 시푸드 뷔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전 수석조리장은 “해산물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날것 그대로 그릴에 구워 최소한의 양념과 함께 먹는 것”이라면서 “해산물은 어떤 재료보다도 싱싱함이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보고 가장 최상의 상태인 재료를 골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골라오는 해산물은 ▶활동성이 좋은 생선 ▶살이 단단한 대게 ▶입을 벌리고 있다 건드리면 재빨리 닫는 조개 등이다. 서울 리츠칼튼 중식당 ‘취홍’의 조경식 셰프도 매주 한번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과 노량진 수산시장에 나가 새벽장을 본다. “가장 좋은 요리는 가장 좋은 식재료 본연의 맛에서 나온다”는 소신에 따라서다.

‘언니네텃밭’의 ‘꾸러미’.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회원들에게 매주 보내주는 반찬거리다.
깨끗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구하겠다는 욕심은 개인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문을 연 SSG푸드마켓 청담점에서는 매일 오전 중 방사유정란이 매진되고 있다. 경북 청송군 산기슭에서 낮에는 밖에서 활동하고 밤에는 숙면을 취하는 토종닭이 낳은 계란이란 말에 소비자들은 4개 3200원이란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앞다퉈 주머니를 열었다. ‘부촌’ 강남의 소비자들임을 감안해도 트렌드 변화는 분명해 보인다.

믿을 만한 식재료에 대한 수요는 ‘꾸러미’라는 독특한 유통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도시의 소비자가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매달 일정한 액수의 회비를 보내면, 농부는 그때 그때 작황에 따라 액수에 맞는 제철 먹거리를 소비자에게 택배로 보내준다. 마치 시골의 부모님에게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철철이 농산물과 반찬을 받아 먹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처음엔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꾸러미’ 사업을 했지만, 최근엔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꾸러미’가 많아졌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서 2009년 사회적 일자리 사업 차원에서 시작한 ‘언니네텃밭’은 현재 전국의 생산자 140여 명이 소비자 1000여 명에게 꾸러미를 보내주고 있다. 주1회 받을 경우 월 회비는 10만원. 한 번 받는 먹거리는 두부 한 모, 계란 여덟 알, 옥수수 3개, 쌈채소 한 묶음, 고구마 줄기 한 봉지, 오이 3개, 양파 5개 정도다. 생산자들은 꾸러미를 보낼 때마다 먹거리에 대한 설명과 산지 근황을 담은 편지도 함께 보내준다.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에 대한 정보다. ‘언니네텃밭’의 서근영 제철꾸러미사업부장은 “지난해 꾸러미 매출이 총 7억여원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했다”면서 “소비자가 믿어주기 때문에 생산자들도 농작물 모양이 들쑥날쑥한 데 부담을 갖지 않고 소신껏 건강 먹거리로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